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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방/아트 이야기방

[스크랩] 낙서가 예술이 되다 자유로운 선과 상상력의 천재 낙서쟁

by tick-tock! 2009. 10. 7.
출처 [글과 감각 그림과 감각] | 보헤미안
원문 http://blog.naver.com/eight23/50071635790 CCL


키스 해링 무제

 자유로운 선과 색채로 도시의 문화를 바꾸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도시의 그늘진 곳을 문화공간으로 만든 천재 낙서쟁이가 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낙서로 지구상을 수놓은 키스 해링(Keith Haring)은 낙서를 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낙서를 통하여 뉴욕의 문화를 바꾸어놓은 예술가였다. 키스 해링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벽면에 그가 가진 상상력과 무한한 에너지의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그는 뉴욕의 평범한 일상에 낙서를 통해 끊임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도시 풍경을 예술을 통하여 바꾸어놓았다. 그의 그림에는 환상적인 생명력과 리비도가 가득한 힘이 보인다. 그의 감각적인 선과 흥미로운 색채에는 인간과 동물의 이 지구상의 생명력이 가득히 넘쳐흐르는 풍부한 느낌이 있다.

키스 해링 댄스

 키스 해링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겼었던 경험들을 선과 색채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창조적인 카타르시스이다. 단순한 듯 보이는 선과 색채를 통해 꿈과 같은 이미지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마치 연금술과 같다. 어떤 그림들은 비장하거나 애처로우며 어떤 그림들은 행복하거나 쾌활하다.

키스 해링 무제 1983년

 키스 해링은 풍부하며 신비한 느낌을 솔직하게 스스럼없이 표현한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는 인간과 동물과 성을, 질서와 혼란을, 생명과 에너지를,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그는 집단적 무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여러 생명체의 에너지와 리비도가 가득히 흐르는 거대한 무질서의 소용돌이를 보여준다. 이 지구상의 생명과 에너지가 그림 속에 가득히 흐른다.

키스 해링 무제 1989년

그는 예술을 통하여 새로움을 넓혔고 사회에 보다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그 자체가 매스미디어의 사건이었으며 젊은이들의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백인과 흑인간의, 이성애와 동성애간의, 인간과 동물간의, 자연과 인공간의 구별을 제거하였다. 그는 어떤 주제든 간에 그 자신을 열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키스 해링 무제 1986년

그는 지하도를 걸어다니며 수천점의 그림과 이야기들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뉴욕, 시카고, 피사, 시드니, 베를린, 애틀랜타,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들을 그림과 이야기로 장식하였다. 그는 학교의 벽면에, 병원의 벽면에, 그리고 버려진 빌딩의 벽면에 돈도 받지도 않고 그림과 이야기들을 장식하였다. 그의 도전은 헌신적이었으며 시대의 흐름에 일치하는 경향을 보였다.

키스 해링 무제 1987년

키스 해링은 펜실베이니아주의 레딩에서 5월 4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사랑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기본적인 그림 그리기를 배웠으며 그를 둘러싼 닥터수스나 월트 디즈니 같은 대중문화로부터 그림 그리기를 익혔다. 그는 뉴욕에서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닌 실외에서 예술을 표현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뉴욕에서는 도심지의 거리를 비롯한, 클럽과 지하도와 같은 공간에서, 댄스홀과 같은 공간에서도 예술과 그림을 자유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키스 해링 무제 1987년

뉴욕에서 공간을 벗어나 자유롭게 예술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의 예술 작업은 키스 해링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젊음의 에너지와 충동을 낙서처럼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림들에 대한 그의 생각에도 그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앤디 워홀의 예술 작업과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예술 작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삶에 예술을 예술에 삶을 통합시켰고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독특한 예술세계를 펼쳤다. 이 무렵 키스 해링은 그의 생애를 진실로 공공미술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키스 해링 무제 1988년

키스 해링은 1980년 무렵에 그가 상상하고 그가 바라는 것을 수많은 관객들과 교감하고 나눌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발견하였다. 그는 지하철의 광고 패널과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도시의 장소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도시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장소에 하얀 초크로 그림을 그렸고 그가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던 장소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키스 해링 무제 1987년

그의 첫번째 전시회는 뉴욕의 토니 샤프러지 갤러리(Tony Shafrazi Gallery)에서 1982년에 열렸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미술 비평가들도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1986년 4월부터는 뉴욕의 소호에서 키스 해링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와 장난감, 포스터와 배지를 파는 소매점이 열려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이 그려진 제품을 구입하였다. 그는 성공하였고 공공미술에 그의 모든 노력을 다해 헌신하였다. 그는 예술을 통하여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키스 해링은 1988년에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그는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였고 그의 재단은 에이즈 환우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을 지금도 펼치고 있다. 키스 해링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해에 그 자신의 질병을 통해 에이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에이즈에 대해 사람들이 행동할 것을 요청했다.

키스 해링 무제 1988년

키스 해링은 삶과 죽음, 사랑과 성, 그리고 평화와 전쟁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탁월한 선의 감각을 통하여 거침없이 진솔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관객들을 매료시켰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접근하기 쉬웠으며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들은 국가를 넘어서 종교를 넘어서 이념을 넘어서 관습을 넘어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20세기의 보편적이며 시각적인 언어였다.


아름다운 낙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여 사회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으며 한 도시의 문화를 바꾸어놓은 천재 낙서쟁이 키스 해링, 만일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가 벽에 있다면 불쾌할 것같지만 키스 해링의 낙서가 벽에 그려져 있다면 아주 행복할 것같아요. 그가 그린 그림의 주제는 이 지구상에 가득히 흘러넘치는 활기와 리비도로 그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활력이 마음에 그려져요. 그는 주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도시의 그늘진 곳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그림을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그 장소를 주목하였고 밝은 문화장소로 변화되었습니다. 감각미 넘치는 선과 밝은 색채가 마음이라는 캔버스에 행복감이라는 그림을 그리네요.